어느 향우회장의 '입신양명'
어느 향우회장의 '입신양명'
  • 송길용
  • 승인 2013.07.2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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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향우들의 분노와 허탈감이 심각해지고 있다.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최소한의 도의마저 저버린 향우회장에 대한 괴리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남의 일세대가 주축이 된 향우회는 힘들고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내일의 희망을 키워왔다. 70년대의 정착기를 지나 생활의 안정권에 접어든 80년대 향우들의 활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성남지역 정치인들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향우회와의 연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향우를 대표하는 회장단의 위상은 높아지고 그에 따른 부수적인 이해관계가 형성돼 왔다.

 향우회가 결정적으로 지역정치와 밀약적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95년 처음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다. 성남시 초대 민선 시장 선거는 약속이나 하듯 영남(오성수)과 호남(김병량) 후보가 맞붙었다. 향우회도 후보의 출신지역에 따라 지지의사를 표명하며 선거에 매달렸다. 결과는 당시 여당(김영삼 정부)후보로 나선 오성수씨가 당선됐다.

 이어 치러진 1998년 민선2기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에 힘입어 호남출신 김병량 후보가 현역인 오성수 시장을 꺾고 당선됐다. 향우회의 후원을 얻어 당선된 호남출신 시장은 임기동안 일부 향우회원들의 온갖 줄 대기에 행보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와 같이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영남과 호남으로 양분된 향우회는 본격적으로 정치색을 띄게 된다. 성남시의 대표적인 향우회는 호남과 영남 그리고 충청과 강원이다. 이 가운데 영남과 호남은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동향후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밝히며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다.

 민선3기 성남시장에 당선된 마산출신의 이대엽 시장이 민선4기 집권에도 성공하면서 8년동안 영남출신들이 대표적인 관변단체나 산하기관 등에서 영광을 누렸다. 이후 민선5기는 영남출신 이재명 변호사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호남향우회의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선거기간 동안 향우회가 어느 정도의 표심을 발휘해 당선에 기여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럴싸한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선거판을 기웃 거리던 향우회의 대표적인 얼굴들이 공신이라며 시 산하기관 등의 요직에 앉아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럴 즈음 어느 향우회장의 입신양명을 위한 행보가 지역사회와 향우회 등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현직 향우회장인 그는 지난해 시 출자기관인 A공기업에 인사위원으로 선임됐다. 이 공기업에는 향우회장의 둘째 아들이 1년 전에 입사해 근무 중이여서 결국 아버지가 아들의 인사품위를 평가하게 된 것이다.

 2개월여를 아버지와 같이 근무하던 아들은 입사 1년만에 사직하고 그 다음날에 또 다른 성남시 산하 공기업에 버젓이 입사했다. 아버지가 이사로 선임된 시기에 B기업의 공채에 응모해 합격했다는 것이다.

 한 번 취업하기도 힘든 공기업에 두 번씩이나 손쉽게 입사한 아들은 취업난으로 고통받는 수백만 실업청년들에 절망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향우회장의 거침없는 행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난 5월 선출직 시장의 복심으로 알려진 시 생활체육회장에 선출됐다. 현직 향우회장 그리고 공기업 이사, 생활체육회장까지 그의 명함에는 현직이 3개나 된다. 행여 향우를 빌미로 자신과 가족의 立身揚名을 노린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올해가 성남시 개청 40주년이 되는 해다. 장화없이 살수 없다던 성남시가 오늘날 인구 100만명에 한 해 예산만 2조3천억원에 이른다. 잘 사는 도시 성남시가 있기까지 향우회의 역할이 지대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쯤 되면 절망적인 이주민 시절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향우 정치인에 매달리던 시절은 뒤로 하고 정치권과 결별해야 한다. 떡고물을 찾아 여기저기 선거판을 기웃거리며 향우을 팔아 챙기는 '입신양명'보다는 가끔은 이웃사촌과 막걸리잔이라도 비우며 인심후한 고향사람이 반가운 향우회가 되어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에는 향우에 이끌려 성남의 미래를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겉으로만 향우를 위하는 회장과 입으로만 시민을 위하는 위정자를 가려내는 혜안(慧眼)이 필요한 시점이다.